역대 세가의 가정용 게임기들과 마찬가지로, 드림캐스트에도 'RPG가 부족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으며, 그것은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RPG가 부족한 드림캐스트를 위해 세가에서는 2000년을 맞아 두개의 대작 RPG를 드림캐스트로 발매하는데, 하나는 가정용 게임계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전 세계 네트워크 RPG '판타지 스타 온라인(Phantasy Star Online, 약자 PSO)',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이 이터널 알카디아지요.
(또한 게임 아츠에서 세가 새턴으로 발매된 대작의 후속편 '그란디아(Grandia) 2'가, 세가의 외주로 '차임(chime)'이란 회사에서 개발한 동화풍의 액션 RPG '내플 테일(Napple Tale)'등이 발매된 2000년은, DC를 가지고 있는 RPG 팬들에겐 그야말로 축제의 1년이었을 것입니다.)
2. 세가의 희망을 싣고
드림캐스트만의 대작 RPG를 표방한 이터널 알카디아에 세가가 거는 기대는 남달랐습니다. 세가 마크 3/메가 드라이브 시절 세가를 대표했던 RPG인 '판타지 스타(Phantasy Star * 주 : 앞서 언급한 PSO와는, 세계관 등을 공유하는 다른 게임입니다.)' 시리즈의 프로듀서인 '코다마 리에코'여사가 프로듀싱을 맡고, '사쿠라 대전(サクラ大戰)'이나 '드래곤 포스(Dragon Force)', '월드 어드밴스드 대전략(World Advanced 大戰略)'등을 제작한 우수한 스탭진이 만든 이 게임은, 역대 최다 인원의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BGM으로 장식되기도 했지요(이때까지 최다 인원의 오케스트라가 BGM을 연주한 게임은, 세가의 드라마틱 슈팅 게임 '팬저 드라군(Panzer Dragoon)' 시리즈였습니다).
마케팅 전법에 있어서도 이터널 알카디아는 남달랐습니다. 일반적인 '통상판'은 물론이고, 세가에서는 거의 만들지 않는다는 인식이 가득했던 호화로운 한정판인 'LIMITED BOX'(이걸 구입한 제 느낌은, 그 호화로움에 비해 내용물은 빛 좋은 개살구 급이라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리고 일정 부분을 진행 후 더 플레이하고 싶으면 인터넷에서 인증 키(Key)를 구입한 다음 계속할 수 있는 획기적인 패키지인 '@barai(일본어로는 '앗토바라이'라고 발음하며, 後払い('후불'이란 뜻의 일본어, 발음은 아토바라이)에서 따온 단어)판'의 3종류의 패키지가 동시에 발매되었지요. 1000엔이라는 부담없는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barai판은, 몇몇 게임 잡지(2000년 10월 3일 발매분의 '주간 패미통' 등)에 부록으로서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상당히 공격적인 마케팅이지요.

@barai판의 패키지, 현재는 인터넷에서 인증 키를 구입할 수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터널 알카디아는 이러한 세가의 기대와 노력에 한참 못 미치는 판매량(일본의 드림캐스트 전문지 '드림캐스트 매거진(현 도리마가)'가 집계한 드림캐스트 소프트 판매량 베스트 20에도 실리지 못했으며, 20위는 캡콤의 '마벨 vs 캡콤(Marvel vs Capcom) 2로 155,887장이었습니다)을 기록하였지요. 드림캐스트가 이미 하향세를 그리고 있었던 시기라는걸 감안해 봐도, 이터널 알카디아의 참패는 커다란 아쉬움을 남깁니다.
드림캐스트판의 설움(?)을 풀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이 게임은 나중에 닌텐도 게임큐브로 추가 요소를 더한 이식판 '이터널 알카디아 레전드(Eternal Arcadia Legends)'로 발매되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이식이라는 것 때문에 역시 그리 큰 반향은 불러일으키지 못했지요. 이래 저래 비운의 게임인 것도 같습니다.

이터널 알카디아 레전드의 표지
3. 드넓은 하늘로 떠나자
이터널 알카디아의 세계에서는, 바다 대신 드넓은 하늘이 존재하며, 하늘을 나는 배들이 공중에 떠 있는 수많은 섬과 대륙을 왕래하지요. 미지의 세계를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항해를 떠나는 '대공(大空)의 대항해시대' 시기인 이 세계에서, 플레이어는 이 세계의 해적(海賊)에 해당하는 공적(空賊) 소년 바이스(Vyse)가 되어 드넓은 하늘을 누비게 됩니다.
 드넓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돛단배 |  이 소년이 주인공 바이스 |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 도전하여 승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의적 집단 '청(靑)의 공적'에 소속되어 있는 바이스는, 같은 섬에서 자란 소꼽친구 아이카(Aika)와,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신비로운 소녀 파이나(Fina)와 함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모험을 떠나게 되지요. 너무 전형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할 소지도 많은 테마입니다만, 이상하게도 진부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1883년 영국의 스티븐슨이 쓴 '보물섬'에서 요즘 대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 '원 피스(One Piece)'에 이르기까지, '항해'와 '해적(이 게임에선 공적이지만)'이란 것은 언제나 꿈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소재이며, 아직까지도 생동감 있게 살아 숨쉬는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해적 이야기는 인기 있는 것 같다
3. 깔끔하고 생동감 넘치는 그래픽
이터널 알카디아의 그래픽은 4년이 지난 지금의 RPG 게임들과 비교해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깔끔합니다. 넓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기후와 풍토를 가진 여러 대륙들의 묘사라던가, 광활한 하늘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주변 경관은 새로운 지역을 찾아 나서는 기대감과 발견할때 느끼는 만족감을 충족시켜 줍니다.

사막 지방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터널 알카디아의 또 다른 그래픽적 특징이라면, 부드러운 동작과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 캐릭터들에 있습니다. 주인공 일행과 주요 인물들이 상황에 따라 연출하는 다양한 표정과 동작은, 마치 한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 하지요. 상점 주인 등 엑스트라 캐릭터의 모델링이 부실한 건 아쉽지만(특히 평면 손을 가지고 있는 무기점 아저씨...-_-;;), 이들도 여타 RPG처럼 단순히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닌, 인사하거나 책을 펼치는 등의 다양한 동작을 가지고 있어 이 게임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들어 줍니다.
 생동감 넘치는 표정의 주인공 |  물론 적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

서브 캐릭터도 한 표정 하는구만
4. 모험을 수놓는 웅장한 사운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터널 알카디아의 사운드는 역대 최다 인원의 오케스트라를 사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오프닝 테마만 들어 보아도 그 웅장함은 단번에 알 수가 있죠. 기본적으로 동일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지만 지나가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곡조가 바뀌는(예를 들어 사막 지방을 지나가는 동안에는 아라비아풍의 음원이 들어가다가, 동양풍의 지방을 지나가면 해금 소리 비슷한 것이 울립니다) 항해 BGM은 긴 항해를 지루하지 않게 해 줍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BGM이 존재하지 않는 부분이 몇 곳 있다는 것인데, 설마 대인원의 오케스트라 투입에 의한 자금 부족이 원인이었을까요?
5. 참신한 두 가지의 전투 시스템
이터널 알카디아의 전투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일반적인 적들과 싸우는 '백병전'과 함선으로 함선 또는 거대 괴물 등과 맞서 싸우는 '포격전'이 그것이지요.
백병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동 차례에 자신과 일행의 행동 커맨드를 입력하고 민첩성이 빠른 자부터 먼저 행동한다는 일반적인 RPG의 전투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거츠(Guts)'와 KP라는 두 가지의 독특한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거츠'는 '배짱, 용기, 근성'정도의 뜻을 지닌 말로, 이 게임에서는 주인공 일행의 '기력'을 나타냅니다. 이 거츠는 모두가 공유하며, 거츠를 일정량 소비해서 강력한 '기술(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위에 보이는 초록색 게이지가 거츠
KP란 이 게임의 '마법'개념인 '황술(煌術)'을 사용하기 위한 포인트(일반적인 RPG에선 MP(Magic Point)가 되겠지요)를 말하는데, 더 강력한 황술일수록 소모하는 거츠가 증가하지만, 어떤 황술을 쓰더라도 KP는 1밖에 소모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포격전은 백병전과 달리 파티 4인의 행동을 전부 입력한 후 적과 자신이 동시에 지정한 행동을 실행하며, 위험한 상황이나 찬스 등을 알리는 표시기가 상단에 표시되므로 그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지정해야 하는 전략적인 전투입니다.
 거대한 적과의 박진감 넘치는 승부 |  역시 거츠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
6. 발견물을 찾아보자
이터널 알카디아의 세계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대륙이나 고대 유적, 신기한 동물등의 '발견물'이 곳곳에 존재합니다. 나침반이 빙글빙글 도는 곳에서 A 버튼을 누르면 발견물이 나타나며, 선원 길드나 마을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힌트도 발견물을 찾는 단서가 되지요. 발견물을 찾아내면 그 정보를 선원 길드에 팔아 돈을 벌 수 있으며, 몇몇 발견물은 스토리 상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것도 있습니다.이러한 발견물은 이 게임의 필드 맵을 단순히 마을과 마을 사이를 잇는 연결 통로가 아닌, 능동적으로 탐험해야 하는 '세계'로 만들어 주지요.

전설의 황금상을 발견했다!
7. 부가 기능도 충실
드림캐스트의 커다란 특징 중에 하나인, 패드의 액정 화면과 휴대용 게임기로도 사용 가능한 메모리 카드 '비주얼 메모리'. 기본 주변기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비주얼 메모리를 제대로 사용하는 게임은 의외로 드뭅니다만, 이터널 알카디아는 비주얼 메모리를 100% 사용하는 게임 중 하나입니다.
게임 중에는 비주얼 메모리의 액정 화면과 비프음을 이용하여 숨겨진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는 기능이 있으며, 게임 내에서 비주얼 메모리 전용 미니 게임 'VM 탐험대'를 다운로드 받을 수도 있지요. VM 탐험대를 플레이해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게임을 진행하는데 유용한 것들 뿐이고, 이 미니 게임을 플레이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레어 아이템도 있습니다.
또한 드림캐스트가 기본으로 장비하고 있는 모뎀을 통하여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인터넷으로밖에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지형과 아이템이 준비되어 있지요.
8. 유명 성우를 대거 기용했지만...
이 게임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초 호화 성우진입니다. '세키 토모카즈', '호리에 유이', '호시 소이치로'등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많이 들어보았을 유명 성우들이 대거 포진해 있지요. 하지만 정작 이들의 목소리를 게임 중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이 게임의 큰 단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인 이벤트에서 이들이 말하는 대사라고는 고작 '핫!' '이얏!'정도의 기합성이나, 대사라고 해봤자 '가자!' '고맙습니다'정도가 고작이지요. 이벤트 신에서의 극히 적은 대사량을 보상하려는 듯 전투신에서는 풀 음성으로 진행이 되지만, 그 전투시의 대사 자체도 기합성과 필살기 사용 대사가 고작입니다. '이렇게 적게 음성을 넣을 거면 왜 이런 초호화 성우진을 기용했지?'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러한 이벤트를 풀 음성으로 즐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고도까지 계산해서 날아야 하는 하늘의 항해는 매우 복잡하지만, 드넓은 월드 맵으로 나가면 나침반과 세계 지도 외에는 참고할 것이 없으며, 가끔 항해사에게 들을 수 있는 힌트도 '뱃사람 섬에서 북쪽으로'정도의 간단한 것이 고작이라는 것도 단점이 될 수 있겠군요. 제 경우 '이거야말로 진짜 항해를 하는 느낌이다!'라며 좋아했지만 말입니다.(^^;)
10. 이터널 알카디아 레전드의 변경점
게임큐브로 발매된 이식작 '이터널 알카디아 레전드'는, 드림캐스트판과 다른 요소가 상당수 존재합니다. 우선 '현상범 잡기'와 '문피쉬(Moonfish) 모으기'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었으며, 드림캐스트판에서만 존재하는 비주얼 메모리 미니 게임과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던 숨겨진 아이템이나 지형은 이 신요소를 통하여 획득 가능합니다.
또한 담배와 술에 대한 표현 규제가 심한 미국에서 발매된 버전을 기준으로 이식하였기 때문에,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캐릭터의 담배가 삭제되어 있으며, '술'이라는 단어가 '로쿠아(Loqua, 영어로 술은 Liquor)'라는 고유의 음료로 변경된 등의 사소한 변경점도 존재합니다(이건 북미 드림캐스트판과 동일).
11. 마치며...
이터널 알카디아는, '처음부터 PS2로 나왔으면 50만장 판매는 거뜬했을 것'이라고 흔히 이야기되는 게임입니다. 기존의 세가 게임이 가지고 있던 매니악한 이미지와는 달리 누구나 쉽게 다가설 수 있고, 뛰어난 완성도와 (일본식)RPG 본연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수작이었기 때문이었지요.
히트작의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도 한 번도 제대로 부상하지 못했던 비운의 작품 이터널 알카디아. 언젠가 리메이크나 후속작 등의 형태로 다시 한번 넓은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추천도 - 8/10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웰메이드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