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는 마케팅 실패로(미국에선 R등급(Restricted의 약자로, 17세 미만은 보호자를 동반해야만 관람 가능한 등급)을 받은 영화를 마치 해리 포터식 판타지인 양 광고했지요) 일찍 막을 내려 버린 '길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 감독의 영화 '판의 미로(Pan's Labirinth, El Labirinto Del Fauno). 저는 이 영화가 꽤 마음에 들어서 어제와 그제 두 번 관람했습니다(첫 번째 관람 시 같이 본 제 여동생(고1)도 저랑 영화 취향이 비슷해서 둘 다 만족했지요).
이 영화는 스페인 내전이라는 현실과 주인공 소녀 '오필리아(Ofelia)'가 경험하는 환상이 긴밀하게 얽혀 진행되는데, 인터넷을 둘러 보니 오필리아의 환상 부분에 대한 해석이 꽤나 다양하더군요. 그래서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본 저도 나름대로의 해석을 한 번 써 볼까 합니다.
심각한 수준의 영화 내용 까발리기(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세요.
이어지는 내용(스포일러 주의)
첫 번째로 소개할 해석은 환상 속의 제일 중요한 등장 인물인, 염소 뿔을 단 그리스 신 '판(Pan)'에 대한 것입니다. 그 이름답게(영단어 Panic의 어원이 Pan이지요) 오필리아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두려움을 상징하는 판은, 절망적인 현실에 직면한 오필리아가 그 현실을 벗어난 안식(요정 나라의 공주가 됨)을 얻기 위해 해야 할 3가지 임무를 내리지요. 즉 이 3가지 임무는 오필리아에게 새롭게 닥친 시련이라기 보다는 이미 오필리아의 마음 속에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판이 내린 임무와 그것을 수행하며 오필리아가 체험하는 환상적인 사건들은 오필리아를 가혹한 현실로 몰아넣은 존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것은 바로 오필리아의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기입니다. 어머니가 비달 대위의 아기를 임신하지만 않았어도 오필리아와 어머니는 고향을 떠나 전쟁이 한창인 산 속으로 이사하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요.
첫 번째 임무에서 오필리아는 열쇠를 얻기 위해 오래된 나무 속에 들어가 있는 두꺼비를 죽여야 합니다. 나무의 생김새는 판의 머리에 달려 있는 뿔과 비슷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나무 밑둥의 구멍에 주목하도록 하지요. 나무에 난 구멍 안이 여자의 자궁을 상징한다고 볼 때, 나무 속 제일 깊은 곳에 살고 있는 두꺼비는 당연히 아기에 해당하겠지요. 오필리아가 두꺼비를 죽이기 위해 두꺼비에게 먹이는 '마법의 돌'은, 어쩌면 먹는 낙태약 같은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 영화의 시대 설정과는 전혀 맞지 않긴 합니다만...
여하튼 오필리아는 두꺼비를 죽이고 그 안에서 열쇠를 얻습니다. 그 후 오필리아가 목욕탕에 혼자 들어가서 백지(白紙)의 책에게 "앞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지니?"라고 묻자 백지의 책은 핏빛으로 물들고, 놀란 오필리아가 목욕탕 문을 열고 나가자 책에서 봤던 것처럼 흰 앞치마를 새빨간 피로 적신 어머니가 눈 앞에 보이지요. 백지의 책은 만약 뱃속의 아기가 두꺼비처럼 죽게 되면 어머니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오필리아에게 보여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어머니의 상태가 위독해져 두려워하는 오필리아에게, 다시 한 번 마음속 두려움이 실체화된 존재인 판이 나타납니다. 판은 우선 어머니를 낫게 할 아기 모양의 허브 뿌리를 준 다음, 두 번째 임무를 알려 주지요. 오필리아가 허브 뿌리를 우유에 넣고 자신의 피를 떨군 다음 어머니 침대 밑에 넣자, 어머니의 몸은 점점 괜찮아져 갑니다.
이 허브 뿌리 아기는 양수라고 할 수 있는 우유 안에서 즐거운 듯 꺄르륵거리며, 모체의 영양분이라 할 수 있는 피를 받아 먹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찾아낼 수(침범할 수) 없는 장소인 침대 밑에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허브 뿌리 아기가 침대 밑에 있는 한 어머니는 건강한 상태일 거라는 것은,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어머니 뱃속에 있는 한 자신도 정신적으로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필리아의 마음을 암시합니다.
어머니의 몸이 안정된 후 오필리아가 수행하는 두 번째 임무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절대 먹지 말고 칼만을 가지고 돌아오라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규칙을 어기게 되고, 결국 손바닥에 눈이 달린 무서운 괴물에게 쫓기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지요. 이것은 오필리아가 자신에게 사랑을 베푸는 가정부 '메르세데스(Mercedes)'와의 사이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가 반란군과 내통했다는 것을 숨기는 것 같이 이 집의 규칙을 어기는 일을 했기 때문에, 괴물로 상징되는 무자비한 남성(비달 대위)에게 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후 오필리아는 허브 뿌리 아기를 돌보다 비달 대위에게 발각되고, 허브 뿌리 아기는 그의 자궁에서 꺼내어져 불 속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 즉시 오필리아의 어머니는 진통을 시작하고, 결국 아이를 낳고 죽게 되지요. 불 속에 던져져서 비명을 지르는 허브 뿌리 아기는, 마치 태어나자마자 잔인한 아버지와 가혹한 현실에 시달려야 하는 아기의 운명을 말해 주는 듯 합니다.
자신을 돌보아 주던 메르세데스의 정체가 발각되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오필리아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집니다. 그때 다시 판이 나타나 마지막 해결법을 제시하지요. 아기를 가지고 자신이 기다리는 미궁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오필리아의 유일한 현실 도피처로 말이지요.
미궁 앞에 도착한 오필리아에게, 판은 요정 나라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그 아기의 피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몇 방울만 필요하니 살짝 찌를 거라고 하지만, 절대 그 정도로 끝날 것 같아 보이지 않지요. 판이 제시한 답은 오필리아가 무의식 중에 바라고 있던 것과 같은 '아기의 죽음'입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그러한 판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고, 차라리 판보다는 더 아기를 아껴줄 것 같은 비달 대위에게 아기를 돌려 주지요.
결국 오필리아는 이 용기있는 선택을 한 보상으로 요정 나라의 공주가 되는 안식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을 상징하던 판도 자신이 일부러 시험해 본 것이었다며 오필리아를 칭찬하지요. 하지만 이 이야기가 결코 해피 엔딩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오필리아에게 있어 이 잔혹한 현실을 벗어나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죽음뿐이었기 때문입니다.